오늘 포스팅 주제는
제가 드라마 태종 이방원을 보면서
궁금한 것 두 가지 였는데요
1. 양녕대군 어리 이야기 가
폐세자 (세자 폐위)에 기여한 바는?
2. 양녕대군 과 충녕대군과의 갈등!
그리고 이 부분을
조선왕조실록을 찾아보면서
드라마 태종 이방원 과 비교를 해보기로!
또한 제가 양녕대군의
대사를 들으면서
라틴어 명언이 생각난 부분이!
이런 부분까지 모두 모아서
신나게 달려보도록 하겠습니다!
Go go go ~
양녕대군 충녕대군과의 갈등
: 드라마 태종 이방원
출처 입력
4월 23일 29회 내용인데요
어제 방송되었던...
양녕대군 어리 이야기를 알게 된 태종이
세자를 궁궐 밖으로 내쫓는 과정에서
세자가 충녕대군과 우연히 만나게 되는...

니 놈이 한 짓이냐?
또 니 놈이 고한 것이냐?
설마 이렇게 얘기를 했을까..
그래서 제가 바로
조선왕조실록
태종실록을 찾아봤는데요
이런 부분이
진짜 있었습니다!
양녕대군 충녕대군과의 갈등
: 조선왕조실록 '태종실록'

"어리(於里)의 일을
반드시 네가 아뢰었을 것이다."
제가 생각하는
충녕대군의 이미지는...
이런 걸 얘기하거나
하지 않을 것 같은..
그러나 실록에서는
충녕 대군이 세자에게 대하여
그를 이끌어서
허물이 없는 지경에 이르고자 하여,
일이 있을 때마다 거의 간(諫)한 것이
전후에 한두 차례가 아니었다.
세자인 양녕대군이
무언가 잘못을 할 때마다
충녕대군이 고하였다고....
이런 부분까지 실록에 나와 있다면
양녕대군 어리 이야기는
도대체 어떻게 나와 있을까...
무엇을 기준으로 나와 있을까
이게 궁금해졌습니다!
양녕대군 어리 이야기 첫 번째 :
조선왕조실록 '태종실록' 중
어리에 관한 이야기가
실록에 언제 가장 처음 등장했는가?
바로
태종실록 33권,
태종 17년 2월 15일 임신 2번째기사
1417년 명 영락(永樂) 15년
세자가 곽선의 첩 어리를 간통하여
궁중에 들여온 사건 기사
이 부분인데요

명하여 전 판관(判官) 이승(李昇)·전 소윤(小尹) 권보(權堡)·악공(樂工) 이법화(李法華)·환자(宦者) 김기(金奇) 등을 의금부에 가두게 하였다. 처음에 악공 이오방(李五方)이 몰래 동궁(東宮)에 들어가 전 중추(中樞) 곽선(郭璇)의 첩 어리(於里)의 자색(姿色)과 재예(才藝)가 모두 뛰어났다고 칭찬하니, 세자가 즉시 이오방으로 하여금 그를 도모하게 하였다. 이오방이 이에 그 무리 홍만(洪萬)과 더불어 곽선의 생질녀의 남편 권보(權堡)에게 청하니, 권보가 말하기를,
이 부분이 중요한 이유!
세자가 어리를 알게 된 것은
악공 이오방 때문이었습니다!
즉 죄가 있는 것은
세자가 아니라 악공 이오방 외
저 무리들이다!
그러므로 저 무리들을 벌하면 될 것이다
라는 느낌이 드는 부분인!
하자, 세자가 소수(小竪)를 거느리고 대궐 담을 넘어 도보로 이오방의 집에 가서 그와 함께 이승의 집에 이르렀다. 어리를 찾으니, 이승이 듣지 않으므로 그에게 강요한 뒤에야 만나게 되었다. 드디어 어리와 함께 이법화의 집에 가서 자고, 그를 궁중(宮中)으로 납치(納置)한 다음, 세자가 활[弓]을 이승에게 보내고, 어리도 또한 비단을 이승의 처에게 보냈으나, 이승은 활만 받고 비단은 받지 아니하였다. 임금에게 계문(啓聞)하고자 하니, 세자가 사람을 시켜 힐난하기를,
그리고 이 부분에서 중요한 것!
뇌물이 오갔다는 것이죠!
이건 뇌물죄가 성립될 수 있는!
세자가 어리를 받고
이승에게 활을 보내고
어리가 이승의 처에게
다시 비단을 보내는!
즉 세자의 강요가 아니라
뭔가를 받고 싶어서
세자를 꾀어낸 게 아니라
이런 식으로
스토리를 만들 수 있는
부분입니다!
그리고
이 일의 결과는 어떻게 이어지는가?

"권보(權堡)가 죄에 굴복하여 말하기를, ‘이법화(李法華)와 함께 곽선(郭璇)의 첩 어리(於里)를 세자에게 바친 것은 세자로 하여금 성상께 아뢰게 하여 저의 몰수된 전지(田地)를 도로 받고자 함에서이고, 또 뒷날에 은혜 입기를 바라서 하였습니다.’ 하고, 이오방(李五方)이 죄에 굴복하여 말하기를, ‘어리를 세자에게 바친 것은 전일에 세자께서 저에게 옷·갓[笠]과 표피(豹皮)·당비파(唐琵琶)·피리[笛]를 내려주신 때문이며, 또 뒷날에 은혜 입기를 바라서 하였습니다. 하였으며, 이법화(李法華)가 죄에 굴복하여 말하기를, ‘권보·이오방과 함께 어리를 세자에게 바친 것은 의복(衣服)을 받으려 함에서이고, 또 뒷날에 은혜 입기를 바라서 하였습니다.’ 하였으며, 이승(李昇)이 죄에 굴복하여 말하기를, ‘그 처음에 모약(謀約)한 것은 알지 못하겠고, 세자께서 불각중(不覺中)에 집에 이르러 어리를 데리고 가신 뒤에 각궁(角弓) 하나를 내려주셨습니다. 처음에는 계달(啓達)하고자 하였으나, 권보의 말 때문에 마침내 중지했습니다.’ 하였으며, 구종수(具宗秀)가 다시 죄에 굴복하여 말하기를, ‘뒷날에 은혜 입기를 바라서 매양 동궁에 나갔으며, 세자를 저의 집에 오게도 하였습니다. 하였고, 구종지(具宗之)·구종유(具宗猷) 등이 죄에 굴복하여 말하기를, ‘병든 어미를 뵙기 위하여 구종수의 집에 갔었는데 구종수가 말하기를, 「세자께서 오늘 밤 집에 오신다.」고 하였습니다. 세자께서 오자, 나가서 뵙고 술잔을 올렸는데, 대개 뒷날에 은혜 입을 계산이었습니다.’고 하였으니, 위에 열거한 자들을 모반 대역(謀反大逆)141) 의 율(律)에 비부하여 모두 능지 처사(凌遲處死)하고 재산(財産)을 몰관(沒官)하게 하소서."
이들이
세자에게 어리를 바친 이유는 모두
뒷날에 은혜 입을 계산으로
즉 양녕이 세자의 자리에 있기 때문에
곧 왕이 될 자리에 있기 때문에
저런 간신배들이
양녕으로 하여금 죄를 짓게 했다!
자신들이
뒷날 은혜 입을 게산으로!
이런 식으로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양녕은 크게 죄가 없다
이렇게 갈 수도 있고
세자가 그대로 보위를 이으면
저런 간신배들이 득세하는
세상이 되지 않겠는가?
태종 이방원을
불안하게 한 요소가 아닐까..
그래서 외척 숙청이
민씨 가문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양녕의 장인인
김한로에게까지 이르는 게 아닌가..
라는 생각이!
양녕대군 어리 이야기 두 번째 :
조선왕조실록 '태종실록' 중
그리고 양녕대군 어리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는 게 아닙니다!
태종실록 35권,
태종 18년 3월 6일 병진 2번째기사
1418년 명 영락(永樂) 16년
임금이 조말생에게 세자의 불의를 말하다
편을 보면

"세자(世子)가 지난 정유년에 전 중추(中樞) 곽선(郭璇)의 첩으로 어리(於里)라고 하는 자를 빼앗아 전(殿) 안에 들이었다가 일이 발각되어 쫓겨났었다. 어느날 청평군 궁주(淸平君宮主)163) ·평양군 궁주(平壤君宮主)164) 등이 와서 중궁(中宮)을 보는데, 내가 마침 이르니, 평양군 궁주가 말하기를, ‘세자전(世子殿)에서 유모(乳母)를 구하여 부득이 이를 보내었습니다.’고 하므로, 중궁(中宮)이 놀라서 말하기를, ‘이게 어떤 유아(乳兒)이냐?’고 하니, 궁주가 말하기를, ‘어리(於里)의 소산(所産)입니다.’고 하였다. 그 까닭을 들으니, 김한로(金漢老)의 처가 김한로의 말을 따라서 종비(從婢)라 칭탁하고 데리고 들어가 바쳤다는 것이다."
좀 기가 막힌 부분인데요...
어리가 발각되어서 쫓겨난 게
태종 17년 일이구요
어리가 아이를 낳았다
라는 말이 태종 18년 기사에 나옵니다!
분명히 쫓겨났었는데?
어떻게 된 것인가..
바로 양녕대군의 장인인 김한로의 부인이
즉 장모가 되는 거죠?
어리를 바쳤다는 거예요!
그래서 애가 생겼다는 거고!

"지난번 간신(奸臣) 구종수(具宗秀)의 사건이 발각되던 날에 나는 우러러 조종(祖宗)의 적루(積累)한 간난(艱難)을 생각하고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황희(黃喜)를 불러서 구종수의 죄악과 세자(世子)의 실덕(失德)을 모조리 말하였는데, 황희가 대답 하기를, ‘구종수의 한 짓은 매[鷹]와 개[犬]의 일에 지나지 않고, 세자의 실덕은 나이가 어린 때문입니다. 나이가 어린 때문입니다.’ 하고 두 번씩이나 말하였는데, 조금도 다른 말이 없었다. 이제 김한로(金漢老)가 세자의 장인으로서, 사직(社稷)의 대체(大體)를 생각지 아니하고 몰래 간휼(奸譎)한 계책을 꾸며서 어리(於里)를 도로 바치었으니, 이 두 사람의 죄는 마땅히 법대로 처치하여야 한다. 내가 아직도 숨기고 차마 그 일을 드러내지 못하고 세자(世子)가 스스로 새 사람이 되기를 기다리니, 두 경(卿)은 마땅히 누설(漏洩)하지 말도록 하라. 만약 세자가 끝내 잘못을 고치지 않는다면 이것은 그가 자취(自取)하는 것이니, 그 종말이 어찌 되겠는가? 좌의정은 나보다 나이가 적으나. 영의정은 나이가 이미 많다. 그러나, 죽고 사는 것은 나이의 늙고 젊음에 관계 없으니, 두 경(卿)은 마땅히 그리 알라."
그리고 여기서 태종의 마음이 나오는데
양녕의 장인인 김한로는 벌하여도
양녕에게는 아직도 기대가...
내가 아직도 숨기고
차마 그 일을 드러내지 못하고
세자(世子)가 스스로
새 사람이 되기를 기다리니
양녕대군은
태종 이방원의 적장자잖아요?
마땅히 왕위에 오를!
자신은 다섯 번째 아들이었고
자신이 왕이 되는 과정에서
왕자의 난도 있었고..
이런 잡음이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뒤를 이을 왕은
잡음없이 깨끗하게!
누가 봐도
정통성을 인정받을 수 있게!
그래서 끝까지
양녕대군을 놓지 않으려는
아비의 마음이 보이는
그런 부분입니다.
이 부분은
태종의 말로 다시 알 수 있는!

"지난번에 세자(世子)가 곽선(郭璇)의 첩(妾) 어리(於里)를 빼앗아 궁중(宮中)에 들이었으나, 내가 즉시 쫓아 버렸다. 이제 들으니, 김한로(金漢老)의 어미가 들어가 숙빈(淑嬪) 을 볼 때 어리를 데리고 몰래 들어가서 아이를 가지게 하였다. 또 세자전에 들어가 데리고 바깥으로 나와서 아이를 낳게 하고, 도로 세자전 안으로 들이었다. 김한로 등이 나에게 충성하고 사직(社稷)을 위하는 계책인가? 아니면 세자를 사랑하여 하는 것인가? 또 들으니, 세자가 성녕(誠寧)이 죽었을 때에 궁중(宮中)에서 활쏘는 놀이를 하였다니, 동모제(同母弟)의 죽음을 당하여 부모가 애통하는 때에 하는 짓이 이와 같다면 사람의 마음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내가 변중량(卞仲良)의 심행(心行)이 부정(不正)하다고 하였으나, 아우 변계량(卞季良)의 마음가짐은 바르다고 하여, 세자 빈사(世子賓師)의 자리에 거(居)하게 하였다. 아비가 능히 자식을 가르칠 수 없으니, 스승이 어찌 능히 가르치겠는가마는, 그러나 세자로 하여금 이 지경에 이르게 하였으니, 책임이 없을 수 없다."
여기서 태종 이방원의 마음이
양녕대군에게서 떠난 게 아닌가
알 수 있는 부분이 나오는데요
태종의 네 번째 아드님이신
성녕대군이 죽었을 때
양녕이 궁중에서
활쏘는 놀이를 했다고 합니다!
누군가의 꼬임에 빠져서가 아니라
주체가 양녕이야!
그럼 잘못한 이 = 양녕인 거고
이런 자가 과연 군왕의 자리에 오를
자격이 있겠는가...
양녕의 세자로서의 자질!
이 부분을 문제 삼을 수 있겠구나...
뭔가 섬찟!
한 느낌이 드는 부분이었습니다!
그래도....
"어리(於里)가 도로 들어간 것은 오로지 김한로(金漢老)의 간휼(奸譎)한 흉계였으며, 세자의 허물은 적다. 이제 세자가 돌아가는 데 의장(儀仗)과 시위(侍衛)는 한결같이 전례(前例)와 같이 하고, 서연관(書筵官)과 경승부(敬承府) 를 다시 두라."
태종 이방원은
세자를 다시 용서합니다!
그럼
왜
양녕대군이 폐세자가 되는가?
사연이 이렇습니다!

4월 8일 밤에 궁(宮)의 담장을 넘어 가서 간사한 소인배의 무리와 더불어 탄자(彈子)를 가지고 등(燈)을 쏘는 놀이를 하였다. 일찍이 폐인(嬖人) 구종수(具宗秀)·영인(伶人) 이오방(李五方) 등과 몰래 결탁하여 담장을 넘어서 궁(宮)에 들어오게 하여 바둑을 두고 술을 마시면서 저녁까지 이르렀고, 혹은 달밤에 군소배와 담장을 넘어 나가서 길 위에서 노닐고 비파(琵琶)를 치면서 놀이하였다. 또 이오방 등과 더불어 구종수의 집에 가서 술에 취하여 새벽녘까지 이른 적이 두 번이었는데, 그 일이 발각되자, 구종수·이오방 등이 모두 복주(伏誅)되었다. 제(禔)가 잘못을 뉘우친다는 뜻으로 맹세의 글을 지어서 종묘(宗廟)에 고(告)하였으나, 얼마 안되어 어리(於里)를 김한로의 집에 숨겨 두고 다시 전(殿)에 들이었다가, 일이 또 발각되니, 임금이 종사(宗社)의 대계(大計)를 위하여 통절(痛切)히 이를 꾸짖어 거의 스스로 새 사람이 되도록 하였고, 또 김한로를 외방에 유배하였다. 세자가 도리어 원망하고 분개하는 마음을 품고 드디어 상서(上書)하였는데, 사연이 심히 패만(悖慢)하고, 또 큰 글씨로 특별히 써서 2장이나 부진(敷陳) 하여 심히 무례(無禮)하였다. 이에 조말생에게 명하여 세자의 글을 가지고 영의정 유정현(柳廷顯)·좌의정 박은(朴訔) 등에게 보이고 말하였다.
"세자가 여러 날 동안 불효(不孝)하였으나, 그러나 집안의 부끄러움을 바깥에 드러 낼 수가 없어서, 나는 항상 그 잘못을 덮어두고자 하였다. 다만 직접 그 잘못을 말하여 뉘우치고 깨닫기를 바랐는데, 이제 도리어 원망하는 마음을 가지고 싫어함이 이와 같은 지경에 이르렀다. 내가 어찌 감히 숨기겠는가?"
김한로가 유배 당한 뒤에
양녕대군이 이방원에게 편지를 보내는데
거기에 원망하는 마음이 가득했다고
그래서 결국
페세자 시킨다..
이런 스토리가 됩니다!
즉
조선왕조실록에서 어리의 등장은
1. 양녕 주위의 간신배 처단
2. 양녕의 외척 (김한로) 처단
3. 양녕의 폐세자 (세자 폐위)
로 이어지기는 하는데
폐세자 되는 부분은
양녕이 왜 그랬을까...
자기 아버지에게
원망하는 글만 쓰지 않았다면
폐세자는 안 되었을 것 같은...
그렇게 권력욕이 강하다면
자기 죽을 자리를
자기가 만드는 짓을 했을까...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입니다..
이런 글을 썼거든요!

"전하(殿下)의 시녀(侍女)는 다 궁중(宮中)에 들이는데, 어찌 다 중하게 생각하여 이를 받아들입니까? 가이(加伊)를 내보내고자 하시나, 그가 살아가기가 어려울 것을 불쌍히 여기고, 또 바깥에 내보내어 사람들과 서로 통(通)하게 하면 성예(聲譽)가 아름답지 못할 것이므로, 이 때문에 내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지금에 이르도록 신(臣)의 여러 첩(妾)을 내보내어 곡성(哭聲)이 사방에 이르고 원망이 나라 안에 가득차니, 어찌 스스로에게서 반성하여 구하지 않으십니까? 선(善)함을 책(責)한다면 이별 해야 하고, 이별한다면 상(祥)스럽지 못함이 너무나 클 것인데, 신은 이와 같은 일이 없었던 까닭으로 악기(樂器)의 줄을 끊어 버리는 행동을 차마 할 수가 없었고, 장래 성색(聲色)을 마음대로 할 계책을 오로지 뜻에 따르고 정(情)에 맡겨서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한(漢)나라 고조(高祖)가 산동(山東)에 거(居)할 때에 재물을 탐내고 색(色)을 좋아하였으나 마침내 천하(天下)를 평정하였고, 진왕(晉王) 광(廣)이 비록 그 어질다고 칭하였으나 그가 즉위함에 미치자 몸이 위태롭고 나라가 망하였습니다. 전하는 어찌 신이 끝내 크게 효도하리라는 것을 알지 못하십니까? 이 첩(妾) 하나를 금하다가 잃는 것이 많을 것이요, 얻는 것이 적을 것입니다. 어찌하여 잃는 것이 많다고 하느냐 하면, 능히 천만세(千萬世) 자손(子孫)의 첩(妾)을 금지할 수 없으니, 이것이 잃는 것이 많다는 것이요, 첩(妾) 하나를 내보내는 것이 얻는 것이 적다는 것입니다. 왕자(王者)는 사(私)가 없어야 하는데, 신효창(申孝昌)은 태조(太祖)를 불의(不義)에 빠뜨렸으니 죄가 무거운데 이를 용서하였고, 김한로(金漢老)는 오로지 신의 마음을 기쁘게 하기를 일삼았을 뿐인데 포의지교(布衣之交) 를 잊고 이를 버려서 폭로(暴露)하시니, 공신(功臣)이 이로부터 위험하여질 것입니다. 숙빈(淑嬪)이 아이를 가졌는데 일체 죽(粥)도 마시지 아니하니, 하루 아침에 변고(變故)라도 생긴다면 보통 일이 아닙니다. 원컨대, 이제부터 스스로 새 사람이 되어, 일호(一毫)라도 임금의 마음을 움직이지 아니할 것입니다."
왜 이런 글을 보내서
스스로 폐세자 되는 길을 걷게 되는 건지...
이 부분을 드라마 태종 이방원에서
어떻게 소화를 하게 될지
기대가 됩니다!
이 편지를 이방원은
자기 욕하는 걸로 받아들였단 말이에요!
"이 말은 모두 나를 욕하는 것이니, 이른바 ‘아버지가 올바르게 하지 못한다.’는 말인데, 내가 만약 부끄러움이 있다면 어찌 감히 이 글을 너희들에게 보이겠느냐? 모두 망령된 일을 가지고 말을 하니, 내가 변명(辯明)하고자 한다."
이렇게 해서
이방원이 스스로
양녕대군을 버리게 한!
즉 양녕대군이 폐위된 사건은
양녕대군 어리 이야기
도 원인이 되는 부분이 있지만
바로 저 서찰 때문이었습니다!
이방원을 욕하는 듯한 서신!
저걸로 폐세자 되는 거예요...
도대체 왜 그랬을까요?
사랑인가...
모르겠다...
양녕대군 충녕대군과의 갈등
: 드라마 태종 이방원 중
라틴어 명언!


용기는 아는 것에서 나오고
두려움은 무지에서 나온다고 했습니다
아는 것이 많아질수록
저같이 용맹하지 못한 사람도
점점 용맹함을 얻어가겠지요
그리고
양녕대군 충녕대군 갈등을
보야주는 장면인데
여기에서 라틴어 명언이!
이런 부분은 놓칠 수가 없죠!
바로 준비했습니다!

Timendi causa est nescire
- Seneca -
The cause of fear is ignorance
두려움은 무지의 소산이다.
충녕대군이 언급한
속제해기에 나온 내용과
같은 라틴어 명언이죠?
알지 못하기 때문에 두려운 것이니까
알면 알수록 그 두려움의 양은 줄어들어
점전 현명해질 것이다!
인간이 왜 배워야 하는가?
바로 저 명언에서 느낄 수 있는!
인간이 두려움과 싸워서 이길 수 있는 방법은
배움 = 앎 뿐입니다!
Will smith 는
두려움이 선택이라고 얘기했지만
세네카는
모르기에 일어나는 일이다
그러기에 알면 된다!
라고 해답을 제시하는!
그리고 충녕대군 역시
자신이 세자의 자리에 올라
왕이 될 준비를 한다면
더 용맹스러워지지 않겠는가..
이런 야심을 보여주는 부분이 아닌가..
그래서
양녕대군 과 충녕대군의 갈등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란 생각이 들었구요.

드라마 태종 이방원
내가 보위에 오르면
넌 살아남기 힘들 거다.
이제 조선왕조실록을 통해서
역사를 알게 된 우리는
저 발언이
행해지지 않을 것을 알고 있습니다.
실록대로라면
양녕대군은 폐세자가 되고
충녕대군은 세종대왕이 될 것이며
그렇게 드라마 태종 이방원은
막을 내리게 되겠죠?
제가 궁금한 건
실록에 나오는 저 서신!
저걸 왜 썼으며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그래서 끝까지
이 드라마를 봐야겠습니다!
엄마랑 동생이랑 ^^

오늘은
양녕대군 어리 이야기 가
폐세자 (세자 폐위) 에 어느 정도 기여했는지
그리고 양녕대군 충녕대군 갈등을
조선왕조실록 과
드라마 태종 이방원을 통해 보면서
라틴어 명언도 함께 보았는데요
제가 tv 보는 거 별로로 생각하는데
확실히 좋은 것 같은..
공부가 되는 드라마네요
역시 사극이 좋습니다!
그리고 이 포스팅은
시리즈입니다!
1. 이방원 민씨! 태종과 원경왕후의 갈등
왜 외척 가문을 숙청했을까?
2. 태종 이방원이 원경왕후 민씨 가문 형제를
어떤 죄목으로 죽였는가?
3. 조선 왕 계보와 이방원 가계도를 보며
이방원 아들들 중 누가 왕이 되는지
4. 이방원 가계도! 양녕대군, 효령대군,
충녕대군 포함 이방원 아들들 딸들 정확히 몇 명?
그래서 궁금한 내용에 따라서
골라잡는 재미가!
오늘도 잼있으셨나요?
레미였습니다!
감사합니다!
행복한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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